[출처] 경향신문_문화_2016. 9. 30.
노닐며 배운다…구속받지 않는 공부,
삶과 통하다
노닒을 사모한 공자
공자는 빙긋이 웃었다. 그러곤 염구더러 말해보라 했다. 그는 크지 않은 나라에 중용된다면 3년이면 백성을 풍족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예악으로 교화하는 것까지는 자신 없다고 했다. 공서화는 더욱 겸손하게 답했다. 그저 배운다는 자세로 종묘 제사나 제후 간 회합이 있을 때 예로써 군주를 보필하길 바랄 따름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증석이 아뢨다. “늦은 봄에 새 옷을 지어 입고 청년 대여섯, 아이 예닐곱과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쐰 다음 더불어 노래 부르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저 옛날, 겨울을 난다 함은 모진 추위와 기아 속에서 죽느냐, 사느냐는 문제였다. 하여 봄은 살아낸 자들이 맞이하는 생명의 환희였다. 새 옷을 지어입고 여럿이 강가에서 묵은 때를 씻어낸 다음 하늘에 제를 올리는 무우로 가 선물 같은 봄바람을 쐰다. 그런 후 더불어 노래하며 삶터로 복귀한다는 바람. 중용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물음의 답변치곤 자못 뜬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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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닒, 삶이 공부로 이어지는 경로
노닒은 확실히 배움(學)과 익힘(習) 등과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배움과 익힘에 대한 공자의 사유를 들여다볼 수 있는 구절은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정도로 해석되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이다. <논어>의 첫 머리인 이 구절의 학(學)과 습(習)에 대해 주희는 <논어집주>에서 다음과 같이 풀었다. “학은 본받는다는 말이다. 인성은 다 선하지만 깨달음에는 선후가 있으니 뒤에 깨닫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앞서 깨달은 이가 행한 바를 본받아야 한다. (…) 습은 새가 걸핏하면 날갯짓하는 것이다. 그침 없이 배우는 것은 새가 걸핏하면 날갯짓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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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노닒은 지금 여기의 우리 현실에 시급히 소환될 필요가 있다. 유아 교육에서부터 고등 교육, 심지어 평생 교육에 이르기까지 학습이 삶과 현저하게 괴리된 지금, 노닒의 공부법은 쉼과 학습을, 나아가 삶과 앎을 긴밀히 연동시키는 쏠쏠한 대안이기에 그렇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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